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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록

유럽 최대의 은광 도시, 쿠트나호라 < Kutná Hora >



자리여행 기록

 여행 부문 : 유럽 최대의 은광 도시,  쿠트나호라  < Kutná Hora >

원문 : 자리의 달콤한 꿈 이야기

글 : 자리 | 이미지 : 유럽 최대의 은광 도시, 쿠트나호라   ( Kutná Hora in Czech )





모든 자료는 여행 순으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블로그 작성 시점에 따라 실질적인 여행기간과 업로드 된 일부 자료사이에 간극이 발생할 수 있으나 블로그에 명시된 시세나 정보는 블로그 공유 시점(2020년 04)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므로 그 이후 변화에만 주의하시고, 게시된 모든 여행기록은 정보공유와 현지 여행 희망자의 참고를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되며 또 다른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와 함께 합니다또한 이 블로그는 네이버 웨일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 있어 모바일을 포함한 플랫폼에서는 화면 상태가 고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게시 글의 사진 이미지는 201508월에 담은 사진을 올린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체코의 세 번째 여행지, 유럽 최대의 은광 도시였던 쿠트나호라(Kutná Hora)’를 찾았습니다. 예정에 있었던 건 아니고 20155월에 전파를 탄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해골 성당편에 자극을 받아 긴급히 결정된 경유지였습니다.






 

 
#01. 국 가 정 보


  정식 국명

  체코 공화국   ( Czech Republic )

  수 도

  프라하   ( Prague  /  Praha )

  언 어

  체코어

  면 적

  78,866

  인 구

  약 10,708,981

  GDP

  2,515  

  기 후

  체코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로 대부분 대서양기후대에 놓여있다. 내륙국가의 지리적 특성상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상당히 크다

  종 교

  무교 34.5%, 카톨릭 10.4%, 개신교 1.1%

  통 화

  코루나  ( Koruna, Kč ) , 보조통화 할레르   ( Haléř )

  환 율

  CZK = 49.40 원  ( 202004월 13일 기준 )

  비 자

  무비자 90일 체류가능 | 비자  ( 솅겐 조약국 )

  시 차

  8시간 ←  ( 서머타임 기간 7시간 ← )

  전 압

  220 V, 50 

  국가 번호

  420 : 프라하  2

  안 전

  절도 및 소지품 날치기 주의




  관련 링크  

■ 체코 관광청

the official travel site - Whether you want to spend your holiday actively in the countryside

   Czech Tourism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입니다.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Czech Republic  

 쿠트나호라 문화, 관광 및 레저

Kutná Hora Municipal Office에서 관리하는 웹 사이트에서 Kutná Hora에 대한 정보에 관심이있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이 포털은 Kutná Hora 및 주변 행사에 중점을두고 있으며 지역 주민과 방문객을위한 포괄적 인 정보 소스입니다.

 『  Kutná Hora  



  관련 정보  ( 출 처 : 위키백과 )  


체코 공화국   < Česká republika >

중앙유럽에 있는 공화국이다. 북서쪽과 서쪽은 독일, 남쪽은 오스트리아, 남동쪽은 슬로바키아, 북동쪽은 폴란드와 닿아 있다. 수도는 프라하이고, 주요 도시로 브르노, 오스트라바, 즐린, 플젠 등이 있다.

체코는 크게 보헤미아(체히), 모라바, 실레시아(슬레스코) 세 지방으로 나뉜다. 체코는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분리되었다. 1999312일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였으며 200451일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이 나라의 민족 구성은 대부분이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체코인으로 인구의 90% 정도를 유지한다. 슬로바키아인은 두 번째로 주요한 민족이다.


서안 해양성 기후   < 西岸海洋性氣候 >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온대 기후에 속하는 기후이다. 주로 남북위 40˚~ 60˚사이인 대륙 서안에서 나타나는 기후로, 대체로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따뜻하며, 연교차가 작다. 대체로 습윤하여 연중 강우량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후가 발생하는 까닭은 기압의 배치와, 난류가 흐르고, 편서풍이 부는 것 때문이다. 습윤한 기후 때문에 안개가 자주 낀다. 대도시와 문명이 발달하기 좋은 곳으로, 실제로 대규모 공업단지와 대도시가 밀집한 지역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쾨펜은 서안 해양성 기후를 가장 따뜻한 달이 22˚C 이하이고, 10˚C 이상인 달이 네 달 이상이면, Cfb, 10˚C 이상인 달이 네 달 미만이면 Cfc로 구분하였다. 서안 해양성 기후는 주로 지중해성 기후 북쪽에 잘 나타나며, 유럽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일부 지역 및 뉴질랜드, 일본 홋카이도의 도난 지방 및 도호쿠 지방의 일부 지역 등이 이 기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한반도 지역에는 북한의 원산시에서 함흥시 사이의 지역에 한하여 서안 해양성 기후를 띄고 있으며, 울릉도와 독도에서도 서안 해양성 기후를 띈다.

일반적으로, 서안 해양성 기후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여 자라는 혼합림이 나타나고, 농작물을 경작하고 가축 사육을 함께하는 혼합 농업 또한 발달한다. 낙농업도 발달하여, 우유로 만든 제품(치즈, 버터, 분유 등)을 얻기도 한다.

, 이러한 기후로 인하여 잔디밭을 이용한 스포츠가 발달하였다.


일광 절약 시간제  < 日光節約時間制  /  Daylight saving time  /  DST  /  서머 타임 ( summer time ) >

하절기에 표준시를 원래 시간보다 한 시간 앞당긴 시간을 쓰는 것을 말한다. , 0시에 일광 절약 시간제를 실시하면 1시로 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낮 시간과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 시간 사이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용한다. 여름에는 일조 시간이 길므로 활동을 보다 일찍 시작하여 저녁 때 직장이나 학교에서 이렇게 '절약된 낮 시간'을 더 밝은 상태에서 오후에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또한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조명과 연료 등의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대 지역에서는 계절에 따른 일조량의 차이가 크므로 일광 절약 시간제는 보통 온대 지역에서 시행된다.

여러 정부는 일광 절약 시간제를 특히 낮시간의 효율적인 사용을 통한 에너지 절약의 효과를 앞세우며 홍보한다. '깨어 있는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전기 조명의 사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광절약시간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주장이 근거가 없다고 반박한다. 소위 "일광절약" 기간 동안 냉방수요를 증가시켜 전반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일광절약 시간제는 수면시간을 연중 두 차례나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교통사고 및 사망 증가, 수면의 질 및 건강의 악화, 인지능력 훼손 및 업무생산성 저하 등 인간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광 절약 시간제는 통상 봄에서 가을까지(3월 중순 ~ 11월 초) 계속되므로 서머 타임의 '서머'(여름)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는 서머 타임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솅겐 조약  < Schengen agreement >

유럽 각국이 공통의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하여 국경 시스템을 최소화해 국가 간의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조약이다.







 


#02. 여 행 일 지


  여행지

  쿠트나호라 ( Kutná Hora )의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v Sedlci )

  분 류

  여행 기록

  기 간

  2015‘ 08. 06

  컨 셉

  여 행

  경 로

  

  유 형

  수동 운전차량

  촬 영

  SAMSUNG GALAXY NOTE EDGE - N915S

  비 용

  약 750 $ 내외  ( 유럽 여행 총 지출액 - 회비 갹출 )

  여행숙소

  -

  관광장소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v Sedlci )






 


#03. 여 행 TIP

 

1). 유레일패스(Eurailpass)를 통하여 열차 뿐 아니라 유레일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여러 제휴사의 페리와 유람선, 호텔과 호스텔 할인, 관광지 입장 및 각종 투어 무료 또는 할인 제공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유럽의 소수 특정 국가만 여행을 계획하는 경우엔 글로벌 패스가 아닌 1개국에서 이동 가능한 원컨트리 패스혹은 2~4개국까지 이용 가능한 셀렉트 패스를 이용하시면 해당 국가를 구석구석 누빌 때 갖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3). 자동차 리스 유로 패스를 이용 시에는 성인 3인 이상일 경우가 유레일 패스에 비해 저렴합니다. 자동차 운행으로 인한 장거리 이동이나 주차에 대한 피로에 비해 근교여행이나 숙소 이용 등에 대한 메리트가 있습니다.


4). 자동차 운행을 위해서는 국제운전면허증을 필히 지참하고 계셔야 하며 교통법규를 사전에 숙지하셔야 범칙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유럽은 자동차보다 보행자와 자전거의 안전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후진적인 교통습관은 버리고 운행하시기 바랍니다. 경적은 가급적 자제하시고 추월을 위해서는 방향지시등으로 앞 차량에게 차선양보를 유도하세요. 특히나 횡단보도 교차로에서는 멈추거나 서행하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5). 주차는 반드시 주차구역에 하셔야하고 네비게이션은 한국어 지원여부 확인과 여행지의 MAP을 반드시 사전에 업데이트 받아 여행 도중 헤매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준비를 해 두셔야 합니다.


6).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 중 장기운행의 피로와 자유 여행 또는 개인이나 소수그룹으로 유럽여행이 부담되는 분들은 인솔자와 현지 기사분이 함께하는 유럽 세미패키지 여행 카페를 검색하시어 일정이 겹치는 분들과 함께 여행 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7). 한 장의 사진, 한 곡의 음악, 지인들과의 수다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신의 생명입니다. 유럽에서는 트램 (노면전차) 노선에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8). 유럽여행정보인증제도(ETIAS)2021년부터 도입될 예정입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비자가 면제되는 국적자가 솅겐 협정국(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내 26개국에서 비자를 취득하지 않고 방문하는 경우, ETIAS 전자인증 시스템에 사전 등록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관련 링크  

■ 유레일

유레일패스 하나면 유럽여행이 더욱 즐거워진다. 31개국 여행이 가능한 글로벌 패스부터 원컨트리 패스까지!

   Eurail  

■ 유럽 여행 정보 인증제도

유럽 여행 정보 인증제도 소개 가맹국, 비자 등 안내.

   ETIAS  



  관련 정보  ( 출 처 : 위키백과 )  


유레일 그룹  < Eurail Group G. I. E >

유럽의 철도 관련 회사이다. 네덜란드계 회사로 룩셈부르크에 본사가 있다. 주 상품은 유레일패스와 인터레일이 있다. 유럽 배낭 여행객들에게 친숙한 회사 중 하나이다. 유럽의 가맹국가에서의 일반 열차 및 통근 열차를 일정 기간 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열차의 경우, 일정 금액의 예약료를 지불해야 한다.


노면전차  시가전차  트램   < 路面電車  市街電車  /  tram >

교통수단의 하나로, 주로 도로상에 부설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동차를 일컫는다.


유럽 여행 정보 인증제도  < EU Travel Information & Authorisation System  /  ETIAS >

유럽 여행 정보 인증제도(ETIAS)라는 것은 비자가 면제되어있는 대한민국이나 미국 등의 국민이, 솅겐 협정국인 유럽의 일부 나라에 (독일, 이태리, 프랑스 등 26개국)에 비자를 취득하지 않고 방문하기 위해 필요한 유럽여행 정보인증제도 입니다.

비자를 보유하지 않은 대상국적자는 사전에 이 ETIAS 전자인증시스템에 신청을 하는 것을 필수로 합니다. 등록된 여권정보는 유로폴(유럽경찰기관)등에 조회되어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솅겐 비자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경우는 비자만으로도 입국이 가능하므로 ETIAS의 신청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전자인증시스템은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이미 도입되어 있습니다.




 



 


#04. 유럽 최대의 은광 도시로




쿠트나호라(Kutná Hora)는 체코 중앙 보헤미아 주에 있는 도시로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약 70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많은 문화 유적이 남아 있는 주요 관광도시 중 하나입니다.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 최대의 은광산(銀鑛山)에서 은광을 채굴하여 이곳에 설치된 왕실 조폐소(造幣所)를 통해 중세 유럽 은화 그로센(groschen)’1/3을 공급하며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프라하와 경쟁하는 대도시가 되었으나 1419년부터 1434년경까지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추종한 후스파와 그들에게 로마 카톨릭교회 권위를 강제하려 한 여러 군주들 사이에 벌어진 후스 전쟁(Husitské války)’‘30년 전쟁으로 황폐해졌다고 합니다.






  관련 정보  ( 출 처 : 위키백과 )  


중앙보헤미아주   < Středočeský kraj >

체코 보헤미아 지방 중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프라하(체코의 수도이기도 함)이며 면적은 11,014, 인구는 1,284,629(20113월 기준), 인구 밀도는 120/이다. 12개 행정구를 관할하며 주도 프라하는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 구역으로 존재한다.

프라하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리베레츠주, 북동쪽으로는 흐라데츠크랄로베주, 동쪽으로는 파르두비체주, 남동쪽으로는 비소치나주, 남쪽으로는 남보헤미아주, 남서쪽으로는 플젠주, 북서쪽으로는 우스티주와 접한다.


30년 전쟁   < 三十年 戰爭  /  The Thirty Years' War | 1618~ 1648>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30년 전쟁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이는 17세기의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라고 한다.

30년 전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교의 대립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전제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근대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국가들은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17세기에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오늘날 평균적인 유럽인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럽인은 논란의 편에 서게 되었고, 종교적 계파는 사람들의 윤리와 충성과 관련이 깊었는데 이는 그들이 충성하는 제후나 왕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하려고 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을 그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그의 이전 황제였던 루돌프 2세에 비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친가톨릭 성향이 강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 공포를 퍼뜨렸고,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해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 선제후를 그들의 황제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왕위를 제후동맹의 승인 없이 받아들였다. 로마 가톨릭이 대부분이었던 남부의 제후국이 이에 반대했다. 이들은 바이에른 선제후를 중심으로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제후연맹을 결성했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은 반란을 제압했으나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이를 비판했다.

보헤미아에서 가톨릭군의 잔학 행위가 이어지자 작센 선제후국이 마침내 개신교 제후동맹에 지지를 표하며 이들과 함께 싸웠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이에 대항해 여러 목적을 가진 개신교 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팔츠 선제후와 인척 관계였던 잉글랜드 왕국이 1625년 전쟁에 개입했고, 홀슈타인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노르웨이가 같은 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스페인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국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도 이들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과 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과 남부 네덜란드를 비롯한 독일과 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과 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참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05. 코스트니체 세들레츠 납골당   ( Ossuary )


05 - 1. 기 본 정 보               _ 출 처 : Sygic


  명 칭

  Kostnice v Sedlci

  완공(설립) 년도

  14 세기 후반

  주 소 (위치)

  Zámecká 279, 284 03 Kutná Hora - Sedlec, Czech Republic

  유 형 (분류)

  교회  /  납골당

  구역면적

  -

  입장시간

  10~ 3월 :  AM 09:00 ~ PM 05:00  /  4~ 9월 :  AM 08:00 ~ PM 06:00

  시설물 이용시간

  1 시간

  입장료

  1.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v Sedlci ) Adults : Kč 90

  2.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v Sedlci ) + 성모 마리아 대성당 ( Kostel Nanebevzetí P. Marie ) Adults : Kč 120

  3.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v Sedlci ) + 성모 마리아 대성당 ( Kostel Nanebevzetí P. Marie ) + 성 바르바라 성당 ( Chrám svaté Barbory ) Adults : Kč 220

  로마 카톨릭 교구 정보센터 ( Zámecká 279 ) - 입장권 구매

  휴관일

  매년 1224

  이용문의

  +420 326 551 049



  관련 링크  

■ 세들레츠

Římskokatolická farnost Kutná Hora - Sedlec | správce světového dědtictví UNESCO

   SEDLEC  




05 - 2. 교 통 정 보               _ 출 처 : Google 지도



  현지 이동

  수동차량

  총 거 

  83.1 ㎞

  예상 소요시간

  약 1 시간

  예상 통행료

  -

  예상 주유비

  -

  경 로

  프라하  ( Praha )  ▶  코스트니체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Sedlec )




05 - 3. 코스트니체 세들레츠 납골당  ( Kostnice Sedlec )


 



약 1시간을 달려 쿠트나호라에 도착했습니다예정에 없었던지라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심과 고딕 양식의 성 바르바라 성당(Chrám sv. Barbory)’ 그리고 성모 마리아 대성당(Katedrála Panny Marie v Sedlci)’은 목적지에서 배제했습니다.


 


 



14세기 전후,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과 오랜 전쟁으로 세들레츠 묘지에는 시신 수 만구가 매장되고 훼손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이후 1784년 황제 요제프 2세는 '수도원 폐지령'을 내렸고, 수도원의 소유권이 독일 귀족 가문인 슈바르젠베르그(Schwarzenberg)’에게 이전되었으며 1870년에는 조각가 프란티제크 린트(František Rint)’에게 부탁해 납골당 내부를 유골로 장식하게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1142년에 세워진 시토회 수도원은 1812년 담배 공장으로 용도변경되어 현재는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 체코 본사로 사용되고 있지만 수도원 건물의 일부였던 세들레츠 납골당(Kostnice v Sedlci)’만은 잘 보존되어 독특한 내부장식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끄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납골당에 입장하기 위해 그곳에서 멀지 않은 로마 카톨릭 교구 정보센터(Zámecká 279)에서 입장권을 구매했습니다. 방문했던 당시와는 달리 가격에 변동이 있었으나 납골당만큼은 변동이 없는 관계로 납골당 이외의 장소를 함께 관람하실 분들은 상단의 기본정보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공동묘지가 먼저 눈에 띕니다. 묘지를 둘러본 후 상부 예배당을 경유하지 않고 지하 납골당으로 직행했습니다. 납골당엔 약 4만 명의 인골, 824만 개에 달하는 뼈로 내부를 치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납골당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고 내려가기까지 눈 앞에 펼쳐진 이 충격적이고도 섬뜩한 광경은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라서 모조품이라는 착각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납골당 중앙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현실감각의 상실을 빚어냅니다. 또한 내부 깊숙한 곳이거나 어둑한 곳일수록 괴기스럽고 음산한 기운이 피어오르는데 그곳을 지키는 수난의 예수 십자가상을 보고 있노라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전파하려는 죽음의 상징(Memento Mori)’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2015년에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해골 성당편에서 납골당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 바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19세기에 독일 귀족 가문인 슈바르젠베르그 가()의 한 남작이 저택 부지를 물색하던 중에 13세기에 지어진 한 건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곳은 1784년 요제프 2세로부터 수도원 폐지령이 내려진 후 방치된 수도원 건물의 일부였는데 이 사실을 접한 남작은 방치된 수도원을 반값에 사들여 허물기 시작합니다. 철거 작업이 한창 진해중이던 어느 날, 지하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유골과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마는데, 이 도시는 한때, 은광을 채굴하여 크게 발전하며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흑사병이 유입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까지 겪게 되면서 묫자리가 턱없이 부족해지자 거리에 방치된 시신과 유골이 늘어감을 가엾게 여긴 세드레츠키수도사는 방치된 시신과 유골을 수습하여 비밀리에 수도원에 안치합니다. 1570,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이 작업을 반복했던 그는 이곳에 죽은 자들을 편히 봉안해 달라는 유언을 편지로 남겼고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870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는 흉물스러운 것들을 치워버리고 작위에 어울리는 대저택을 지어야 한다고 종용하지만 남작은 저택 건축을 포기하고 수도사의 뜻을 이어받아 성당을 짓기로 결심한 후 유골로 성당을 꾸며주길 당부하자 조각가는 유골들을 소독한 뒤 석회를 발라 내부를 치장하게 됩니다. 이때의 조각가 프란티제크 린트의 서명을 내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은 세계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더 늘어날 전망임에도 불구하고 교구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경우, 2020년부터 세들레츠 납골당의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제한된다는 사실입니다. 여행 기록을 남기고 싶은 열망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누군가의 가족이자 이웃이었을 망자들의 공간에서 애도가 아닌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고 주저됩니다만 일부 관광객들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촬영하는 행위를 위해서는 유골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실제로 납골당 내에는 유골들은 엄연히 시신의 일부이니 예우를 갖춰달라는 안내문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부착돼 있지만 이 같은 행위가 잇따르자 내놓은 조치라서 더더욱 불쾌해집니다.     FIN.




  관련 정보  ( 출 처 : 위키백과 )  


시토회   < Ordre cistercien  /  Ordo Cisterciensis >

가톨릭교회의 봉쇄 수도회 가운데 하나이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하얀색 수도복 위에 검은색 스카풀라레를 걸치는데, 이 때문에 이따금씩 백의(白衣) 수도자들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시토회 생활의 역점은 수작업과 자급자족이며, 많은 시토회 소속 수도원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이나 맥주 제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체적으로 경제를 부양하고 있다.

시토회라는 수도회 명칭은 프랑스 중동부 디종 인근의 마을 시토에서 유래한 것이다. 몰레즘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사 무리가 성 베네딕토 규칙을 보다 엄격하게 따르기 위한 목적으로 1098년 시토에 대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들 초창기 멤버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수사들은 로베르 드 몰렘(St. Robert de Molesme), 알베릭 드 시토, 잉글랜드에서 온 스티븐 하딩이었는데, 모두 초창기 시토 대수도원의 아빠스를 지냈다.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30명의 동료들과 함께 1110년대 초기에 시토 대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시토 수도회를 급속하게 확장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2세기 말엽까지 시토회는 프랑스에서 뻗어나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동유럽 등지로 진출하였다.


흑사병  < 黑死病  /  Black Death  /  Pestilence  /  Great Plague  /  Plague  /  Black Plague >

14세기 유럽에서 7500~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상 최악의 범유행이다. 흑사병 병원균에 관한 많은 이설이 있었으나 2010-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DNA 분석 결과 페스트의 병원균인 페스트균이 병원균으로 밝혀졌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반도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 쥐들에 기생하던 동양 쥐벼룩을 기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 총인구의 30-60%가 목숨을 잃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5천만 명-3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이 줄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뒤로도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산발적으로 유행했는데(런던 대역병 등), 흑사병의 병원체를 페스트균으로 확정한다면 흑사병이란 1345년에서 1840년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계속된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의 일부로서 14세기 유럽의 범유행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에서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2세  < Joseph II  | 1741313~ 1790220>

로마왕(1764~ 1765)이었으며, 그의 아버지인 프란츠 1세가 죽은 뒤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765~ 1790)가 되었다. 그러나 재위 초기(1765~ 1780)에는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제국을 공동 통치하였고, 모후가 죽은 뒤에야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보헤미아의 국왕 요세프 2(체코어: Josef II.),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요제프 2(헝가리어: II. József, 슬로바키아어: Jozef II. 요제프 2, 크로아티아어: Josip II. 요시프 2)에 해당한다.

요제프 2세는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요제프는 뛰어난 기억력과 호전적이고 냉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요제프는 결혼을 통해 딸 한 명만을 얻었으나, 그 딸은 요제프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요제프의 후계자는 동생 레오폴드가 되었다.

군주로써 요제프는 계몽전제군주적 성향을 띄었으며, 생전에 많은 개혁을 추진했다. 요제프가 이룩한 관료 체제는 오스트리아에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요제프의 계몽절대주의는 관료화와 반교황주의적인 가톨릭주의가 결합되었는데, 이를 요제프주의라 한다. 요제프주의는 19세기까지 발전했다. 그는 농노제를 폐지하고 '종교적 관용에 대한 칙령(Patent of Toleration)'을 통해 법 앞에서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수립했다. 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가톨릭교회 예수회를 해산시켰다. 이같은 개혁조치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황과 갈등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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